
1996년 대학생이 됐다. 비슷한 시기 홍대 인근에서 라이브 클럽이 하나 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즈음부터 2000년대 전까지, 홍대 인디 신은 가히 전성기를 누렸다. 대한민국 음악계의 지형도를 전복할 것처럼 보였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익숙할 이름, 예를 들면 크라잉넛, 노브레인, 자우림, 장기하, 국카스텐, 10센치, 실리카겔, 한로로 등이 잊을 만하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 세계 음악계가 사실 다 비슷하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디 신 전체가 파란을 몰고 온 역사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없다. 다만 인디에 뿌리를 둔 음악가나 밴드가 성장해 주류로 진출한 ‘수많은’ 사례가 있을 뿐이다.
그중 한 밴드로 델리스파이스(Delispice)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을 최소 10번은 넘게 봤다. 1996년 이후 홍대 라이브 클럽을 내 집처럼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기실 델리스파이스는 음악적인 실험을 다양하게 가져간 밴드다. 특히 1980년대 영국 음악계의 영향을 많이 받아 데뷔 당시 징글쟁글 팝과 매드체스터(Madchester)풍 음악을 들려줬다.
이 외에 그들의 음악에서는 약간의 그런지와 슈게이즈, 사이키델릭 등도 느낄 수 있다. 대표곡이라 할 ‘항상 엔진을 켜둘께’(2001), ‘챠우챠우’(1997) 등을 들어보면 징글쟁글 팝, 매드체스터, 슈게이즈의 잔향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항상 엔진을 켜둘께’에서는 영국 밴드 스미스(The Smiths)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내가 지금도 가끔씩 챙겨 듣는 델리스파이스의 곡은 무진장이다. 한두 곡만 고르기는 너무 어렵다. 그럼에도,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이 곡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 ‘고백’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 곡은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먼저 사랑 받았다. 조승우, 손예진 주연의 『클래식』(2003)에 삽입되지 않았으면 이 곡이 지금처럼 널리 사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온 것도 다 『클래식』에 흐른 덕분이었다고 봐야 한다.
기본 조성은 B Major지만 반음을 낮춘 '하프 다운 튜닝' 상태에서 C Major 스케일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오픈 코드가 주는 풍성한 울림을 활용하기 위한 모던 록 밴드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템포는 80 BPM이다. 곡이 진행될수록 사운드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는데 특히 후렴구에서 디스토션이 걸린 일렉트릭 기타의 시원한 스트로크와 크래시 심벌이 더해지면서 인상적인 공간감을 완성한다. 이런 류의 곡 구성을 싫어할 사람은 글쎄,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코드 진행을 보면 영리한 구성을 취하고 있음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차근차근 내려오는 베이스의 하향 진행이 주는 아련함과 머니 코드의 변형이라 할 후렴구 진행의 폭발력을 두루 아울렀다는 점이 핵심이다. 뭐로 봐도 한국 모던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 ‘고백’이 지닌 음악적 매력은 화려한 테크닉이나 복잡한 구성보다는 모던 록 특유의 담백한 질감과 서정적인 멜로디, 그리고 가사의 섬세한 스토리가 완벽하게 맞물린 데서 나온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이 괜히 ‘시인이 뽑은 아름다운 노랫말’에 선정된 게 아니다.
참고로, 이 곡의 가사는 일본 만화 『H2』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H2』가 아다치 미츠루(Adachi Mitsuru)의 대표작이지만 일본에서는 보통 『터치』를 거론한다. 한국에서는 『H2』가 『터치』보다 먼저 발간된 덕분이다. 물론 우리 집에는 두 작품 다 있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