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학창 시절을 되돌아본다. 1977년생이다. 1990년대에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고, 이 시절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음악을 꼽자면 당연히 무진장이다. 그중 일본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불법이었다. 다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일본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서 들었다. 복사가 늘어날수록 음질은 떨어졌다. 상관없었다.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처럼 느껴진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리라.
아직도 기억난다. 1990년대 최고 인기였던 엑스 재팬(X JAPAN)의 음악을 CD로 구입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한 음반 가게로 향했다. 정보에 따르면 대학로에 있는 이곳에서 그들의 명반 『Blue Blood』(1989)와 『Jealousy』(1991)을 CD로 살 수 있었다. 가격은 알 수 없었다. 일반적인 CD 가격이 1만 원 언저리니까 3만 원 정도면 충분하겠지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3만 5천 원이라는 가격에 나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CD는 그 당시에도 비쌌다. 일본 음악 CD는 더 비쌌다. 나는 패잔병의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 복사한 카세트테이프를 닳고 닳을 때까지 들었다. 내 기억에 ‘Art of Life’였을 것이다.
이랬던 시절이 어느덧 훌쩍 지나 일본 음악은 이제 완전한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얼마 전 여의도 ‘더 현대’에서 열린 일본 밴드 미세스 그린 애플 (Mrs. Green Apple) 팝업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미세스 그린 애플의 최신작 『POPS』는 내가 꼽는 ‘올해의 음반’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어느덧 일본 음악을 한국 가수가 커버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가 왔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밴드, 오피셜 히게 단디즘(Official髭男dism,
OFFICIAL HIGE DANDISM)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월 열렸던 그들의 내한 공연은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대성황을 이뤘다. 대표곡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이 곡, ‘Pretender’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2019년 4월 영화 『컨피던스 맨 JP –로맨스편』의 주제가로 발매되어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곡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Pretender’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의 곁에 남아 마치 연인인 척, 혹은 괜찮은 척 스스로를 속이며 사랑을 이어나가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낸 노래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정교한 화성학적 장치가 돋보인다. 곡의 메인 키는 Ab Major(A플랫 장조). 기본적인 팝의 왕도 진행을 기본으로 도미넌트 변형과 세컨더리 도미넌트를 절묘하게 배치(I-V-III7-VIm7(Ab 키 기준: Ab-Eb-C7-Fm7))해 감정의 고조를 극대화한다.
곡이 시작하자마자 흘러나오는 펜타토닉 기반 기타 리프는 곡에 청량한 톤을 확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화려하면서도 애수에 차 있고, 그러면서도 착착 감기는 핑거링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후지와라 사토시의 보컬은 진성과 가성을 오가는 테크닉으로 듣는 이를 사로잡고, 후렴구의 높은 음역대 역시 매끄럽게 처리하면서 가성으로 전환될 때 무너지는 화자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음악적으로 이 곡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콘트라스트(대비)에 있다고 본다. 1980년대 어덜트 오리엔티드 록(AOR)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청량한 건반과 기타 톤, 경쾌한 16비트 리듬이 전면에 서 있지만 화성은 멜랑콜리한 디미니쉬와 세컨더리 도미넌트를 품고 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Pretender(연기자)'의 내면을 음악 구조 자체로 구현해낸 명곡이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